둠즈데이 북

연극+책 2020. 3. 23. 09:51 Posted by 바나나피쉬

코니 윌리스의 1992년 작이었던가? 네네에 소개 글 뜬 거 읽고 꽂혀서 킨들 질렀다. 예전 킨들 기계가 잘 돌아가서 편하게 잘 읽었네. 이건 나를 위한 -_-; 책인데 왜 지금에서야 발견했을까? 그러고 보면 옥타비아 버틀러의 Kindred와도 일맥상통하는군. 다만 둠즈데이 북은 개인적 특이성보다는 시간여행을 할 수 있는 시스템 자체가 마련된 2050년대가 배경이라는 게 차이랄까. 왜 지금 다시 소개되는지 알 수 있는 책이다. 시기적절하고, 1990년대나, 2050년대나 (작가의 상상력 속 세계이지만), 2020년대나 다를 건 하나도 없다는 게 절실히 느껴진다.

2050년대가 되면 역사학자가 연구하는 시대로 시간여행을 할 수 있는 네트가 구성되고 각각의 시기는 1-10까지 등급이 매겨져 시간여행 가부를 결정하게 된다 (전쟁, 역병의 시대는 10이라 원칙적으로 못 간다). 시간여행의 패러독스로 인해 과거나 현재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요소가 생기면 네트가 열리지 않아 이동이 불가능하게 되는 합리적인 시스템이다. 시간여행을 가게 된 사람의 경우 미리 랑데뷰 날짜를 정해 떨어진 장소(같은 수식을 사용해서 연 네트는 같은 장소에만 다시 열린다)에서 기다리면 네트가 픽업한다. 그러니 랑데뷰 날에 무조건 도착한 장소와 같은 곳에 있어야 하는데, 문제는 과거의 모습을 정확히 예측하기 어려워 도착 장소가 매우 뜬금없을 수 있다는 것 (숲 한가운데랄까, 폐쇄지역이랄까). 주인공인 키브린은 중세를 연구하는 역사학도로 새내기 때부터 시간여행만을 위해 살아온다. 그리고 마침내 크리스마스 무렵에 1320년으로 가게 되는데! 대학 내의 답답~함이 느껴지는 교수 간의 알력 다툼과 준비 부족과 근거 없는 통계자료 오용 등 복장 터지게 만드는 일이 벌어지던 와중에 네트가 열리고 키브린의 시간여행이 시작된다. 그러나 통계적으로 볼 때 제 때, 제대로 이루어질 것이라 믿었던 모든 것이 틀어지고, 키브린의 중세 여행과 맞물려 현대에서는 갑자기 전염병이 돌아 대학의 모든 시스템이 마비되고 만다. 현대에서 키브린을 지도했던 교수들이 전염병과 싸우며 키브린을 구하기 위해 애쓰고, 과거로 간 키브린은 자신이 떨어진 세상이 1320년이 아니라 무려 28년이나 차이나는 1348년, 즉 흑사병이 창궐하는 시기임을 알게 된다 (이것까지도 책 소개에 나왔던 기억).

지루하다는 평이 많았는데 그 이유는 아마도 앞부분에 벌어지는 일 때문에 연속으로 복장이 터져서가 아닐까. 그런데 실제 현실이 그렇지 않나? 이건 오히려 하이퍼리얼리즘이여. 시간여행 네트를 열고 이를 관리하던 엔지니어가 병으로 쓰러져서 생사를 넘나 드느라 키브린이 어떻게 되었는지 정확하게 알려줄 수 없게 되고, 전염병에 뜬금없이 인도(India)가 붙는 바람에 병 옮기는 사람들 몰아내라고 (이주 반대) 밖에서는 데모하고, 시간여행의 네트를 통해 바이러스가 넘어왔을 것이라고 믿는 관리자와 일반인으로 인해 네트가 닫히기도 하고, 병원에서는 환자의 안정을 위한다며 정보를 완전 차단해서 오히려 해결이 안 되게 만들고. 거기다 뭔가 중요한 내용을 전달하려고만 하면 끊기는 바람에 읽는 사람이 짜증 난다. 그냥 말을 해! 붙잡고 물어보라고! 버티고 있어! 하면서. 중세로 간 키브린도 별반 다르지 않은 상황이라, 각종 예방 접종을 다 하고 갔는데도 뜬금없이 도착하자마자 아파, 거기다 아파서 거의 기절한 바람에 생각도 안 했던 마을로 끌려가서 도착 장소가 어딘지 몰라, 현대 영어를 중세 영어로 자동으로 번역해준다던 번역기는 비교 자료를 축적하는데 시간이 걸려 먹통되고, 준비 잘했다고 생각했는데 다 틀어져서 옷이며 신분까지 제대로 먹히는 게 없고! 그래도 끝까지 따라가면 보상을 얻게 될 것이다.

2050년대라고 해봐야 오늘날과 크게 차이가 없는데, 가장 큰 오류?라면... 휴대전화가 없어! 화상통화는 하는데 휴대전화는 아무도 들고 다니지 않는다. 이게 의사소통을 막아 독자의 답답 지수를 올리는 데 지대한 공헌을 하지. 전화를 안 하면 메시지라도 해야 하는데 그것도 없네... 작가가 생각을 못 했나, 아니면 2050년쯤 되면 오히려 사소한 연락에서 벗어날 수 있을 거라고 믿었나? 이걸 제외하고는 그냥 오늘날이라고 생각해도 될 만큼 거리감 없는 글이다. 거기다 역사학자의 시간여행이라니! 안 갈 사람 아무도 없을 듯 ㅎㅎ. 책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다 요즘과 너무나도 유사해서 역시 인간사 별 다를 게 없구나 싶었다. 옥스포드 시간여행 시리즈가 두어 권 있다고 읽은 기억인데 한 번 찾아볼까나? 아니면 힐러리 만텔 책이나 살까? (BBC 라디오에서 읽어주긴 하더라만...)